|

우리가 독립운동을 할 때 돈이 준비되어서 한 것도 아니고 가능성이 있어서 한 것도 아니다. 옳은 일이기에 또 아니하고서는 안될 일이기에 목숨을 걸고 싸웠지 아니하냐
- 조봉암, <어록>에서.
죽산 조봉암 선생 비운의 정치인 죽산 조봉암(1899~1959)과 비운의 정당 진보당.
진보당은 6.25전쟁 뒤 민주사회주의를 표방하며 1956년 11월 10일 결성하여 창당 15개월 만에 이승만 정권에 의해 등록이 취소되고, 1958년 2월 25일 소멸되었다. 그리고 당수 조봉암은 처형되었다. 한국 현대정당사에서 가장 혁신적인 정강ㆍ정책을 제시하고, 가장 비참한 모습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6.25 한국전쟁이 겨우 휴전협정으로 마무리 된 1950년대 중반, “한국전쟁에서 조금이라도 좌파 내지 진보적 색채를 띤 사람들은 철저히 학살당하거나 북으로 가거나 아니면 지리산으로 들어가 죽어버렸다. 분단과 전쟁과 학살이 휩쓸고 간 한반도 남쪽에는 멸균실 수준의 반공이 이루어졌다.”(주석 1) 이런 상황에서 조봉암은 ‘평화통일론’과 “노동독재도 자본독재도 거부하는” 민주사회주의 깃발을 내걸고 진보당을 창당하고 활동에 나섰다가 참변을 당했다. 이승만의 ‘반공 히스테리’(주석 2)의 희생물이 된 것이다.
한국의 혁신세력은 1951년 7월 2일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암마인에서 채택된 사회주의인터내셔널의 강령인 <프랑크푸르트 선언>을 계기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민주사회주의 또는 사회민주주의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프랑크푸르트 선언>은 히틀러와 스탈린의 전체주의 독재라는 역사적 체험에 기초를 두고, 민주적사회주의의 진로를 밝히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첫째, 자본주의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 사회보장ㆍ완전고용ㆍ생활수준의 향상이 필요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경제성장과 분배의 평등화를 지향하는 사회주의적 계획화를 추진하여야 하고, 둘째, 좌우익의 어떠한 형태의 독재로부터도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지키기 위하여 정치적 민주주의가 불가결하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이 선언은 전문 <민주사회주의의 목적과 임무>에서 다음과 같이 천명했다.(요약)
민주사회주의는 자본주의사회 고유의 폐해에 대한 저항운동으로서, 인간에 의한 인간의 수탈이 폐지되어야 한다고 믿는 모든 사람에게 호소하고 있다. 민주사회주의는 생산수단의 소유자이거나 관리자인 소수자에게 의존하고 있는 상태의 사람들을 해방하여 경제력을 국민전체의 손에 넘겨줌으로써 자유로운 사람들이 평등한 인간으로 함께 일하는 사회를 만들어 내어야 한다. … 많은 나라에서는 자유방임의 자본주의 대신 국가간섭 및 공공소유로서 사적자본가를 제한하는 경제가 들어서고 있다. 사람들은 계획의 필요성을 더욱 더 인정하고 있다. 사회보장, 자유노동조합, 산업민주주의 등이 지반을 넓혀 가고 있다. … 최근 세계 저개발지역의 민족들은 국민적 자유와 보다 높은 생활수준을 위한 투쟁에 있어서 민주사회주의가 가치 있는 수단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 토지개혁과 공업화와 산업공유제도의 확장과 생산자ㆍ소비자 협동조합의 발전을 통해서 대중의 생활수준을 향상시킬 것을 요구한다. … 민주사회주의는 사회정의, 보다 좋은 생활, 자유 그리고 세계평화를 위해서 노력한다. … 민주사회주의는 국내 및 국제문제에 있어서 자유와 계획을 표방한다. 민주사회주의는 민주주의의 최고형태이다. (주석 3)
한국 혁신계 인사들은 6·25 전쟁과 이승만의 폭정을 겪으면서 민족의 진로를 민주사회주의 또는 사회민주주의 이념으로 인식하고 활동에 나섰다. ‘멸균실 수준’의 반공체제, ‘반공 히스테리’가 판치는 풍토에서 민주사회주의와 사회민주주의는 공산주의와 동렬이거나 사촌 쯤으로 인식되었다. 그래서 박멸의 대상이 되고, 합법 공간에 설 자리를 갖지 못하였다. 아울러 ‘진보’라는 용어도 ‘평화통일’이라는 말도 배척되었다.
진보(Progre's/Progress) - 여행자는 자신이 뒷걸음친다고 착각하지만 사실은 앞으로 나아가고 있고, 목적지에 가까이 왔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길을 잃고 헤매고 있다. 자기와 가까이 있다고 느껴지는 두 지점이 사실은 멀리 떨어져 있으며 이제 앞으로 간다 뒤로 간다는 개념은 의미가 없어질 것이다.
평균 수명은 살인의 방법이 증가하는 것과 같은 속도로 늘어날 것이며 농업은 기아와 함께 발전할 것이다. 시장의 세계화는 전지구의 연대를 강화하게 될 것이며 이와 동시에 정체성의 추구는 민족국가를 증가시킬 것이다. 통신수단, 학습과 기분 전환의 방법은 고독의 기회만큼 무한정 늘어날 것이다. 미래에는 선과 악의 끔찍한 공존 속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주석 4)
현재 프랑스의 대표적인 지식인 자크 아탈리가 내다 본 ‘진보’의 개념이다. ‘선과 악의 끔찍한 공존’은 미래가 아니라 이미 1950년대 한국에서, 자유당과 민주당, 그리고 진보당 사이에 한동안 이루어졌다. 그러나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지 못한 ‘공존’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승만 대통령에게 현재적이든 잠재적이든 도전하는 사람은 죽음(죽임)이 따랐다. 제헌의원 선거에 이승만과 대결한 독립운동가 최능진은 처형되고, 잠재적 라이벌 관계이던 백범 김구는 암살되었다. 야당 대통령후보 신익희와 조병옥은 병사하고, 현직 부통령 장면은 수하들이 총을 쐈지만 ‘불행히’(다행히) 죽지 않았다. 다음은 조봉암 차례였다.
농림부 장관 시절의 죽산 제 2, 3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하여 이승만에 도전하고, 제 4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조봉암은 정권에 위협적인 인물이 되었다. 이미 3대 대선 때에 혼쭐이 났었다. 자신이 조각할 때에 농림부장관으로 발탁했던 사람을 좌경 용공으로 몰아 처형하고 진보당은 해산시켰다. 조봉암의 <평화통일론>이 정부의 북진통일론에 배치된다는 이유를 댔지만 배경은 ‘정적제거’에 있었다.
한국의 ‘반공 히스테리’ 세력은 60년이 지난 지금에도 남북화해 협력이나 비판세력을 친북 좌경으로 몰아붙이는 터에 당시에 정적이나 비판세력에 붉은 딱지 붙이는 일은 식은죽 먹기였다. 조봉암은 공산주의사상을 민족해방운동의 이념으로 삼고 사회혁명사상으로 받아들여 일제와 치열하게 싸우다가 해방을 맞아 전향했다. 이승만 정권에 똬리를 튼 친일파들은 자신들의 반민족행위를 재빨리 반공주의로 탈바꿈 하면서 독립운동가ㆍ남북협상세력ㆍ반독재 인사들에게 용공의 너울을 씌우고 더러는 형장으로 끌고갔다.
그들에게 반공은 구원의 메시지이고 자신들을 감싸준 이승만은 바로 구세주였다. 그래서 ‘국부(國父)’의 뜻이라면, ‘국부’를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최능진이고 김구이고 장면이고 조봉암이고 가릴 것이 없었다. 그들은 독립운동의 전력이나 현재의 위치 따위는 안중에 없었다. 이승만 정권의 안위는 곧 자신들의 생존의 길이고 입신출세의 방편이었다. 정권ㆍ사법부ㆍ군ㆍ검찰ㆍ학계ㆍ언론계에서 친일파는 새로운 주류가 되고 있었다.
암살ㆍ테러ㆍ사형(私刑)ㆍ납치ㆍ투옥 등 정적제거의 여러 가지 방법 가운데 ‘사법살인(司法殺人)’의 방법도 활용되었다. 조봉암에 적용된 제거의 방식은 사법살인이었다. 상식적으로 사법부는 시비정사(是非正邪)를 엄정하게 가리는 국가기관이다. 현대 민주주의 국가가 3권 분립을 원칙으로 하는 것은 입법부나 행정부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다루는 사법부에 간섭하지 못하도록, 그래서 법관과 검찰은 오로지 양심과 법률에 따라 사법권을 행사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런 사법부가 행정부의 하수인이 되어 사법의 칼날을 마구잡이식으로 휘두른다면, 정치보복이 자행되고 인권이 유린되어 민주주의는 끝장이다.
1995년 4월 25일 문화방송(MBC)이 우리 나라의 근대적 사법제도 100주년을 기념하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면서 현직판사 315명에게 보낸 설문조사에서 판사들은 인혁당사건 재판이 “우리 나라 사법사상 가장 수치스런 재판이었다.”고 응답하여, 법조인들도 이 사건이 정상적이지 못했음을 시인했다.
제네바에 본부를 둔 국제법학자회의는 인혁당사건의 최종 판결이 날 때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했으며, 국사사면위원회(엠네스티)에서는 ‘야만적인 살인행위’라고 박정희 정권을 비난했다.
박정희 정권은 1974년 4월 9일 유망한 인물 8명을 ‘사법살인’했다. 형식적인 재판의 절차를 거쳤으니 살인에 사법부가 하수인 역할은 한 것이다. 하여 ‘사법살인’이라 이름한다.
인혁당사건보다 16년 전인 1959년 7월 31일 진보당수 조봉암도 ‘사법살인’의 희생자가 되었다. 이승만 정부는 사법부를 동원하여 독립운동가이고 초대 농림부장관과 국회부의장을 두 번이나 지낸 사람을 좌경용공으로 몰아 처형했다. 어김없는 ‘사법살인’이었다. 보수야당과 신문들이 침묵했다. ‘공범’까지는 몰라도 ‘종범’이라 해야 할 것이다.
이승만ㆍ박정희ㆍ전두환 독재정권이 필설로 다 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패악을 저질렀지만, 무엇보다 무고한 사람들을 사법의 이름으로 죽인 것처럼 용서받기 어려운 죄악도 달리 없을 것이다. 사람이 죄를 지은 대가로 사형을 당하는 것도, 하늘이 준 인명을 차마 할 일이 아니라고 하여 사형제 폐지가 국제사회의 대세가 되고 있는 터에, 죄를 날조하여 사법의 이름으로 사람을 죽이는 행위는 일반 살인행위보다 훨씬 악랄한 죄악이다.
어떤 이유로도 용납되기 어렵다. 그것도 정치적 라이벌, 나라의 큰 인물을 죽인 행위는 결코 용서받기 어려운 죄악이다. 역사적으로 소크라테스도, 예수도 ‘사법살인’에 희생되었다.
주석 1) 한홍구, '현대한국의 저항운동과 촛불', <창작과 비평>, 2008년 가을호, 15쪽. 2)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50년대편 3권>, 262쪽, 인물과 사상사, 2004. 3) 양호민 편역, <사회민주주의>, 283~286쪽, 종로서적, 1985. 4) 자크 아탈리, <21세기 사전>, 288~289쪽, 중앙 M&B, 1999.
2009.12.20 21:55:19 (*.106.205.227)
![포인트:3316point (75%), 레벨:6/30 [레벨:6]](./modules/point/icons/default/6.gif) 다짐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