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디앙에서 퍼옴
NL과 PD를 넘어서서
[사민주의와 차세대 노동운동①] "20~30대 주역되는 운동"

이 글은 사회민주주의연대, 좋은정책포럼, 혁신네트워크가 ‘노동운동, 활로는 있는가’라는 제목으로 오는 19일 오후 3시부터 6시까지 프레스센터 19층 기자회견장에서 주최하는 토론회에서 발표될 필자의 발제문이다.

이 글에서 필자는 노동운동의 현주소를 진단하고, 노동운동의 위기적 상황을 가져온 요인들을 살펴본다. 그리고 “사회민주주의가 차세대 노동운동의 깃발”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여러 가지 쟁점을 내포하고 있는 이 글이 노동운동의 전망을 찾는 다양한 노력이 진행되는 현 시기에 의미 있는 논쟁을 촉발시키기를 기대하며, 필자의 동의를 얻어 전문을 몇 차례 나눠 싣는다. <편집자 주>

1. 민주노조운동의 종말과 차세대 노동운동

지난해 여름 노동운동가 권용목이 돌연사했다. 그는 1987년 노동운동의 상징적 리더였다. 그런데 그는 하필이면 1987년에 시작된 ‘민주노조운동’을 비판하는 책을 쓰다가 과로사하였다. 얼마나 이해하기 힘든 일인가? 그의 죽음을 1987년 체제와 87년 노동운동, 민주노조운동의 슬픈 종말을 상징하는 한 사건으로 보는 건 엉뚱한가?

권용목의 화살과 잘못된 과녁

그가 쓴 책, 『민주노총 충격보고서』 에는 민주노총이 '선진화의 발목을 잡는 주범이자 우리 사회를 위협하는 괴물'로 규정되어 있다고 한다. 그는 민주노총 초대 사무총장이었다. 그런 그가 뉴라이트 신노동연합의 상임대표로서 민주노총 공격에 앞장섰다는 것부터 충격이다. 그러나 냉정하게 말하면 민주노총을 향해 그가 날린 화살은 남의 과녁을 향하여 날아갔다.

그가 민주노총을 공격한 것은 주로 도덕성의 측면이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도덕 문제가 아니다. 노동운동가들이 성인군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밝힌다는 것이 큰 의미가 있을 것 같지 않다는 이야기다.

중요한 문제는 민주노총이든 누구든 과연 노동자를 위한, 노동자계급 전체를 위한, 즉 미조직 노동자를 포함하여 모든 노동자를 위하고 그래서 자연히 국민을 위하게 되는 노동운동, 즉 대의(大義)에서 벗어나지 않는 노동운동을 하였는가라는 것이다.

민주노조운동의 위축과 무력화는 인간사회 어디나 있는 부패 따위가 아니라 사회적 고립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민주노조운동은 지금 철저히 고립되고 있다. 그에 따라 도덕적, 정치적 영향력을 상실하였다. 민주노조운동, 그 조직적 실체인 민주노총은 진보진영으로부터도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고 있다. 민주노총으로부터 거리를 두어야 진보진영의 살 길이 열릴 거라는 충고도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상황을 배경으로 이른바 노동조합원들의 실리추구는 더욱 노골화되고 민주노총으로부터 산하 노동조합들의 탈퇴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공무원 노동조합의 가입으로 일시 만회하기는 했지만 민주노총의 세력이 급감할 위기 앞에 놓여 있다. 공무원 노동조합의 가입 역시 항구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지극히 불안정한 상태에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임성규의 경고와 이재영의 비판

임성규 민주노총 위원장은 2009년 9월 16일, <레디앙>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민주노총 간부들, 정당운동가들 등 대부분의 사람들이 ‘민주노총이 하루아침에 망할까?’라고 생각한다. 오판이다. 일본의 총평이란 조직이 하루아침에 망하지 않았나. 지금의 위기를 치유하고 극복하지 못하면 민주노총은 하루아침에 망할 것이다. 그리고 그 시점은 2010년이 될 것이다.”

다시 부연하기를 “사업장 지도부 몇 사람이 흔들리지 않는다고 현장 조합원들이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때문에 복수노조와 전임자 임금지급 등 하반기 몇 가지 위기와 고비를 넘기지 못하면 민주노총은 쉽게 무너질 것이다.”라고 말했다. 민주노조운동이 안주하고 있었던 물질적 기초가 밑바닥부터 흔들리고 있다는 것이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그 이유는 근본적으로 너무 오랫동안 기업임금에 매몰된 노동운동을 계속한 데에 있다. 2006년 10월 2일, 이재영은 <레디앙>에 쓴 글에서 민주노조운동이 ‘자기 월급만 올리는 노동운동’이 되었다고 비판했다. 그는 민주노조운동이 한국 노동자계급 내에서 임금격차가 벌어지고 불평등이 심화되는 데 일조하였다고 비판한다.

그에 따르면 민주노조들의 “요구안에 들어있는 사회적 의제나 비정규직 의제 같은 것이 교섭과 쟁의 과정에서 상습적으로 행방불명되고, 결국 조합원의 임금만 살아남는 뿌리 깊은 관행이” 문제다. 그러니까 “민주노조운동의 단체 협상에서 취약 노동계층의 근로조건이 자기 이익의 극대화를 위한 교환수단으로 쓰여진 셈”이라는 것이다.

위기의 근원은 정치투쟁의 결핍

오늘날 한국의 임금 노동자들은 같은 계급이라 부를 수 없을 만큼 임금 격차가 크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 이르는데 민주노조운동이 저항하기보다 오히려 일조를 했다는 것은 참으로 심각한 일이다. 이로써 민주노조운동은 먼저 노동자계급 내에서 신뢰와 도덕적 영향력을 잃어버렸다. 그래서 얻은 불명예스러운 이름이 ‘귀족노조’다. 물론 당사자들로서는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억울한 이름일 것이다.

그래서 이른바 ‘귀족노조’에 가입하지 못한 많은 비정규직 노동자, 사내외 하청 기업 노동자, 중소기업 노동자들은 민주노총을 백안시하고, 심지어 적대시 한다. 거기다 몰락 위기에 몰린 자영업자들은 노동조합에다 나빠져 가는 경제 상황에 대한 모든 책임을 돌리고 쌍욕을 퍼부으며 화풀이를 한다. 그래서 민주노총이 한국 사회에서 왕따를 당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를 이렇게 본다면 얼핏 보기와는 달리 정치투쟁 과잉이 민주노조운동의 위기의 근원이 아니고 정치투쟁 결핍이 위기의 근원이라고 말할 수 있다. 허식적인 정치투쟁 과잉은 있었지만 실질적으로 노동자계급 전체, 혹은 조직되지 않은 90%의 노동자 가운데 다수를 차지하는, 조직된 10%의 노동자보다 더 열악한 생활을 하는 노동자들의 이익을 위한 투쟁은 부족했다.

흔히 보수언론들은 민주노총이 시도 때도 없이 ‘정치투쟁’을 벌인다고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닌가? 정치투쟁이 사회적 의제, 전국민적 요구 또는 노동자계급 전체의 이해를 대변하는 투쟁이라면, 심지어 전계급적 이익이나 전국민적 이익을 위해 자기 눈앞의 이익을 희생하기도 하는 것이라면, 그리고 그것이 제대로 이루어졌다면 이렇게 민주노조운동이 고립될 리가 없지 않겠는가?

사실을 말하면 정치투쟁이 제대로 이루어진 일이 없었다. 정치투쟁은 항상 자기 이익의 관철을 위한 방패로 이용되었을 뿐이다. 정치적 혹은 사회적 이슈를 내세우기는 했지만 그것을 진지하게 추구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것은 진정성 없이 그저 말로만 내세웠던 목표였다. 이재영은 “간혹 들고 나오는 사회개혁투쟁이나 정치총파업은 임금인상투쟁 매몰이라는 비난을 모면키 위한 양념이나 알리바이”였다고 위에 인용한 글에서 비판하고 있다.

노동운동, 정직성의 추락

그런 일이 오래 지속되니 노동운동의 정직성도 떨어져 왔다. 그동안 수시로 불거진 일부 노동운동가들의 도덕적 타락보다 훨씬 더 근원적인 문제는 바로 ‘정직하지 않은 노동운동’이었다. 도덕적 타락은 바로 운동적 타락으로부터 왔다.

물론 1987년 직후 몇 년 동안은 ‘자기 월급만 올리는 노동운동’을 하여도 그 영향으로 다른 사업장의 월급도 올랐고 사업장의 분위기도 민주화되었으며 노동자들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 시절은 ‘자기 월급만 올리는 노동운동’만 해도 괜찮은 시절이었다.

한 사업장에서의 투쟁은 다른 사업장에 영향을 미치고, 한 사업장에서의 노사관계의 변화 발전은 다른 사업장의 노사관계에도 좋은 영향을 주었다. 그래서 한동안 민주노조운동의 사회적 영향력이 매우 컸다. 아마 1997년까지도 그러한 상황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이제 그것은 옛날이야기가 되었다.

더욱 심각한 것은 민주노조운동이 다음 세대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1987년의 활동가, 고참 노동조합 간부들이 여전히 깃발을 들고 집회에 참석한다. 민주노총의 집회에는 머리카락이 허연 장년들이, 늙은 노동자들이 주축을 이룬다. 대기업, 공기업에는 이들보다 늦게 직장에 들어온 사람들이 적기도 하거니와 노동조합 가입율도 낮고 가입하더라도 간부를 맡아서 책임을 지거나 앞장서지는 않는다.

그래서 노동운동가들은 스스로 묻는다. “과연 우리들 1987년 노동운동 세대가 정년퇴직을 한 후에도 민주노조운동은 이어질 수 있을까?”

차세대 노동운동 모색할 시점이 왔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차세대 노동운동’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될 지점에 왔다. 민주노조운동의 혁신으로는 부족하고, 이제는 차세대 노동운동을 기획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국노총으로 대표되는 1세대 노동운동, 민주노총으로 대표되는 2세대 노동운동, 즉 민주노조운동을 넘어서 제3세대 노동운동을 전망하고 그 가능성을 타진해야 하는 것이다.

지금의 20대, 30대가 주역이 되는 노동운동을 우리는 상상한다. 우리는 그것을 차세대 노동운동, 또는 3세대 노동운동이라 부른다. 그리고 우리는 차세대 노동운동이 사회민주주의운동의 일부가 될 것이라 믿는다. 그래서 사회민주주의가 차세대 노동운동을 주도하는 이념이 되리라고 본다. 그것은 민주노조운동의 이념이 NL과 PD였던 것과 대비된다.

2010년 01월 14일 (목) 10:50:11 주대환 / 사회민주주의연대 공동대표 redian@redian.org
주대환 / 사회민주주의연대 공동대표의 다른기사 보기  

     

운동권 자기 반성-진보 해체 우선
사민주의는 밥먹여 주는 민주주의
[사민주의와 차세대 노동운동②] "민족민주 운동 호소력 상실"

이 글은 사회민주주의연대, 좋은정책포럼, 혁신네트워크가 ‘노동운동, 활로는 있는가’라는 제목으로 오는 19일 오후 3시부터 6시까지 프레스센터 19층 기자회견장에서 주최하는 토론회에서 발표될 필자의 발제문이다.

이 글에서 필자는 노동운동의 현주소를 진단하고, 노동운동의 위기적 상황을 가져온 요인들을 살펴본다. 그리고 “사회민주주의가 차세대 노동운동의 깃발”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여러 가지 쟁점을 내포하고 있는 이 글이 노동운동의 전망을 찾는 다양한 노력이 진행되는 현 시기에 의미 있는 논쟁을 촉발시키기를 기대하며, 필자의 동의를 얻어 전문을 몇 차례 나눠 싣는다. <편집자 주>

2. 정파와 민족민주운동, 그리고 사회민주주의운동

이렇게 민주노조운동이 사회적으로, 심지어 같은 임금 노동자계급 내에서도 고립되는 데에는 정파의 책임이 크고 무겁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노동운동의 신경과 두뇌에 정파라는 바이러스가 침투하여 탄력성을 가지고 상황에 적응하는 능력이 마비되었기 때문이다.

정파들은 내부 투쟁에는 유능하지만 외부 투쟁에는 지극히 무능하고 상대 분파를 파악하는 데는 빠르지만 노동자 대중이나 국민 대중의 마음을 파악하는 데는 늦다. 또 내부 투쟁을 우선하다 보니 명분론이 항상 앞선다. 명분은 효과적으로 상대를 공격하는 수단이 되지만 동시에 자기 자신의 발목도 묶는다.

정파보다 무력한 민주노총 집행부

민주노총의 고질적인 정파 투쟁은 정직하게 자기 주장을 내놓고 대중의 심판을 받는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노선의 차이라는 것도 애매하다. 그러다보니 주로 도덕적인 문제로 상대를 흠집 내는 방식으로 정파 투쟁을 해왔다. 그래서 주로 형식 절차나 도덕적 문제를 따지는 데는 능하지만 실질적 문제는 다룰 능력과 의사가 없다. 그래서 정파는 분파를 벗어나지 못한다.

임영일 교수에 따르면 강신준 교수가 최근에 쓴, 노동운동 정파 문제를 분석한 논문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한국 노동운동 내에 활동가들은 더 이상 ‘정파’ 활동가들이 아니다. 둘째, 이 정파들은 그 내용을 들여다보니 전혀 정파가 아니다. 그저 ‘분파’일 뿐이다. 셋째, ‘분파’의 틀 속에 갇힌 활동가들은 오로지 자기 분파가 조직의 권력을 장악하는 일에 거의 모든 에너지를 소진하고 있다.

넷째, 따라서 연대가 필요한 부분에서 분열을 일삼고, 격렬한 노선투쟁이 필요한 부분에서는 오히려 담합을 일삼는다. 다섯째, 따라서 한국 노동운동이 재생하려면 제대로 된 정파들이 (재)형성될 필요가 있다.”(<레디앙> 2009년 10월 4일)

임성규 민주노총 위원장은 위에 인용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간 민주노총은 주체 역량 분석을 냉정하게 못해 왔다. 분석하는 사람 역시 각 정파와 연관돼 있으니 손대기가 쉽지 않다. 민족분단, 남북문제, 김대중 정권, 신자유주의 정책, 노사관계 등의 정세분석에서 정파적 경향성과 맞물려 시각차가 존재한다.

한편 정파조직의 지도부가 대중조직의 지도부가 가진 지도력과 장악력을 넘어 서고 있다. 현재의 정파조직은 민주노총 대의원대회를 유회시킬 수 있는 힘을 가졌을 만큼 집단화되고 있다. 이런 문제는 해결해야 한다.”(<레디앙>. 2009년 9월 16일)

실무진이 모두 정파의 시각에서 사물을 바라보니 민주노총의 집행부가 원하는 체계적인 주객관적 인식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민주노총 집행부는 정파조직의 지도부보다 무력하다고 느낀다.

노동운동의 질곡이 된 '운동권' 

민주노총의 문제는 바로 민주노동당의 분당 사태와도 관련이 있다. 민주노총은 노동자 대중의 힘으로 민주노동당의 정파를 제압하지 못하였다. 마침내 분당에 이르게 된 지경에도 최대 주주이면서도 속수무책으로 한탄만 하고 있었다. 민주노동당의 분당 사태는 한국의 노동운동이 하나의 정당을 운영할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최종적으로 확인해주었다. 그것은 '쪽수'가 모자라서도 아니고 '돈'이 없어서도 아니다.

2004년의 일시적 성공의 환상과 원내 진출의 오만에 빠진 이른바 PD파 당 활동가들 역시 대중정당으로서 진보정당을 만들 수 있는 길은 오직 '노동당 노선'밖에 없다는 사실을 잊거나 뼈저리게 알지 못해서 예사로 분당을 하고 말았다. 그들이 언제부터 이른바 '종북주의' 노선과 제대로 된 투쟁을 벌였던가? 그들은 일심회 사건 당시에도 침묵으로 일관하였다.

정파란 무엇인가? 정파는 당연히 다양한 노동운동가들로 이루어지지만 이론적, 이데올로기적으로는 이른바 ‘학출(學出) 활동가’들의 영향력이 매우 크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학출 활동가, 또는 운동권(運動圈)이라 불리는 사람들, 이들의 도움으로 민주노조운동이 성장하였지만 그만큼 이제는 그들이 민주노조운동의 발전을 가로막는 굴레가 되고 있다.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 노동자 출신 활동가들 사이에서는 학출 활동가들이 이제 노동운동에서 떠나주기를 바라는 목소리도 나온다. 그런가하면 노동운동 주변에서 노동운동에 관여해온 지식인들의 책임론도 나오고 있다. ‘독립적인 지식인’으로서 노동운동의 어떤 흐름에 대해서도 거리를 유지하면서 객관적으로 비판하지 않고, 종파 또는 분파의 이익에 복무하거나 ‘곡학아세(曲學阿勢)’해온 학자들의 엄정한 자기비판이 요구된다.

지금까지 노동운동에 여러 가지 방식으로 간여해온 지식인들의 책임이 실로 무겁다. 그들은 노동운동이 '열사' 칭호를 남발하는 데도 일조하였다. 투쟁의 내용과 목적을 보지 않고 투쟁의 겉모습에 취하였다. 그래서 이정호 <참세상> 편집국장은 이렇게 말한다.

지식인들의 솔직한 자기반성 필요

"90년대 초 대공장 정규직 노동자의 임금인상 투쟁을 둘러싼 공권력과 충돌을 혁명적 계급 투쟁으로 미화한 스스로를 되돌아보며 부끄럽기 그지없다." 노동운동에 간여했던 지식인들이 지금 해야 할 일은 바로 이런 솔직한 자기반성이다.

이재영도 위에서 인용한 글에서 “계급 전체에 미치는 영향이 아니라 자본과의 투쟁 양상만으로 노조운동을 평가하여 경제투쟁 매몰을 고무해온 활동가, 노동단체, 노동학자, 정파들은 노동계급 분열의 방조범이다.”라고 비판하였다.

물론 노동운동의 정파에는 나름대로 이론 또는 노선이 있었으니 ‘전투적 조합주의’와 ‘실리적 조합주의’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런 노선들은 결국 끊임없이 NL과 PD로 수렴되었다. 그것은 노동운동이 민족민주운동의 범위를 넘어서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노동운동은 기대와는 달리 여태까지도 민족민주운동의 영향권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 민족민주운동의 시대는 가고 사회민주주의운동의 시대가 오고 있다. 그러므로 노동운동이 민족민주운동 시절의 잔재를 청산하고 현재를 살고 있는 근로대중의 생활로 돌아가서 사회민주주의운동의 시대를 여는 데 앞장서야 한다.

자본주의가 덜 발달하고 민주주의가 정착하지 못하고, 아직 민족이 해방되지 않았거나 독립국가를 만들지 못하고 있거나, 아니면 만들었더라도 아직 자립적이지 않은 그런 나라와 시대의, 쉽게 말해서 후진국의 진보는 민족민주운동이었다. 민주화세력은 자기들이 민족민주운동을 주도하였다고 생각한다. 경험과 감각은 그 방향으로 발달해있고, 자부심은 그것을 밑천으로 하고 있다.

민족주의도 민주주의도 호소력을 잃었다

그러나 민족주의도 민주주의도 이제 별로 호소력이 없다. 왜냐하면 이미 국민들이 느끼기에 민족주의운동의 목표와 민주주의운동의 목표가 달성되었기 때문이다. 국민들은 이미 꿩을 잡고 나면 미련 없이 활을 내던지고, 토사(兎死)하고 나면 미련 없이 구팽(狗烹)한다. 그런데 민족민주운동을 한 사람들은 아직도 청춘에 미련이 남아 있고, 좋았던 그 시절을 잊지 못한다. 그 추억을 먹고 산다.

예를 들면 최근에 이명박 정부가 민주주의에 역행하는 행태를 보이자, 당장 그 의미를 과대평가하여 파쇼 독재의 귀환을 경고하는 민주화세력들이 많다. 그러나 그들이 그런 행동을 통해서 드러내는 것은 바로 자신들이 여전히 후진국형 민족민주운동의 진보라는 사실이다. 그런 시절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것은 어쩌면 자기 자신인지도 모른다. 자신들이 그런 싸움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진보’, 사회민주주의운동은 사회경제적 문제의 해결을 중심 과제로 삼아야 한다. 이른바 민주정부들이 들어선 후에 "더 먹고살기 힘들어졌다"고 느끼는 평범한 국민들의 정서로 돌아가야 한다. 현실을 냉정하게 인정하고 진보는 이제 ‘밥 먹여주는 민주주의’를 해야만 국민의 마음을 되돌릴 수 있는 것이다. 그 ‘밥 먹여주는 민주주의’가 바로 사회민주주의다.

그래서 진보는 ‘재구성’되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재구성되기 위해서, 진보는 먼저 해체되어야 한다. 해체되어야 하는 진보는 민족민주운동이었다. 그리고 재구성되어야 하는 진보는 사회민주주의운동이다. 바로 여기에 사회민주주의(SD)가 노동운동의 새로운 조류로서 등장하는 역사적 필연성이 있는 것이다.

2010년 01월 15일 (금) 08:50:25 주대환 / 사민주의연대 공동대표 webmaster@redian.org

진보와 세 개의 사회주의
[사민주의와 차세대 노동운동③] "위대한 실용주의 철학"

이 글은 사회민주주의연대, 좋은정책포럼, 혁신네트워크가 ‘노동운동, 활로는 있는가’라는 제목으로 오는 19일 오후 3시부터 6시까지 프레스센터 19층 기자회견장에서 주최하는 토론회에서 발표될 필자의 발제문이다.

이 글에서 필자는 노동운동의 현주소를 진단하고, 노동운동의 위기적 상황을 가져온 요인들을 살펴본다. 그리고 “사회민주주의가 차세대 노동운동의 깃발”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여러 가지 쟁점을 내포하고 있는 이 글이 노동운동의 전망을 찾는 다양한 노력이 진행되는 현 시기에 의미 있는 논쟁을 촉발시키기를 기대하며, 필자의 동의를 얻어 전문을 몇 차례 나눠 싣는다. <편집자 주>

3. 사회민주주의(SD)는 ‘이념이 아닌’ 이념이다

‘사회민주주의’를 대단히 어렵고 복잡한 이론의 문제로 접근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그들은 복잡한 역사의 우여곡절을 들어서 이야기를 빙빙 돌린다. 때로는 사회경제체제의 하나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그래서 그것이 자본주의냐 아니냐는 평가, 본질 규정을 두고 설왕설래 한다.

그러나 그 모두에 앞서서 사회민주주의는 원래 노동운동의 이념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오랜 시간 대중과 함께 해온, 대중운동의 이데올로기다.

그것은 엘리트주의와는 다른 길을 걸어왔다. 그것은 어렵고 복잡한 이론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다. 여러 나라에서 다양한 환경과 조건 속에서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오랜 세월 경험의 누적으로 형성되어 온 것이다. 그래서 사회민주주의는 지식인과 노동자 대중이 함께 만들어온 이데올로기라고 할 수 있다.

지식인과 노동자 대중이 함께 만든 이데올로기

어떤 노동운동가가 말한 대로 “이념이 아닌 이념, 대중이 하자고 하는 대로 하는 것, 그것이 사회민주주의다.” 엘리트가 인민을 억압하거나 속이거나 선동하는 데 사용하는 그런 이념이 아니다.

스웨덴 사회민주당의 정치가, 이론가들인 잉바르 카를손과 안네마리에 린드그렌이 쓰고 윤도현 교수가 번역한 『사회민주주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모든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사회민주주의란 무엇을 추구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각각 저마다 개성적인 답변을 가지고 있다. 사회민주주의당은 모든 당원이 무조건 추종해야만 하는 경직된 교리체계를 가진 정당이 아니며, 과거에도 결코 그런 적이 없었다.”라고 힘주어 말하고 있다.

일목요연한 교리가 없는 것은 좋게 말하면 미래와 새로운 상황을 향해 열려 있다는 것이지만, 바로 그 점이 지식인들에게 인기가 없고 종종 경멸의 대상이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것은 사회민주주의의 치명적 약점이지만, 뒤집으면 사회민주주의의 최대의 강점이며 질긴 생명력의 원천이며, 사회민주주의가 노동자의 이념이 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박경신 교수는 ‘사회민주주의는 탈이념화된 자유와 평등에 대한 갈구의 표현’이라고 표현한다. 그에 따르면 이념은 공포에서 나온다. 미국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의료보험개혁에 대한 논란을 예로 들고 있다. “민영을 없애겠다는 것도 아니고 민영의 혜택을 못 받는 사람들을 공영으로 구제하겠다는 상식적 제안에 대한 미국 사회 일각의 반응은 틀림없이 이념적이다.”(<헤럴드 경제> 2009년 9월 29일자)

그는 “정부 환율정책을 비판하는 네티즌을 100일 이상 감옥에 가두는 것은 공포의 발로이며, 용산에서의 죽음을 추모하려는 아줌마 1명을 300여명의 전경이 둘러싸는 것도 공포의 발로”라고 하면서, “이 공포에서, 그리고 그로부터 촉발되는 이념에서 벗어나 우리는 자유와 평등에 실사구시적으로 몰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러한 실용적 몰입, 실질적인 자유와 평등의 추구는 사회민주주의적 제도들을 검토하게 한다는 것이다. 또 “이념적 두려움과는 달리, 사회복지가 튼튼한 사민주의 국가들은 경제발전에 있어서 미국식 자본주의 국가들보다 성장 속도가 조금도 떨어지지 않는다.” 뜻밖에도 ‘보수적인’ 경제 신문의 지면에서 우리는 사회민주주의의 본질에 대하여 한 마디 들을 수 있다.

세 새대 좌파 이데올로기

그러면 왜 우리나라에서 사회민주주의는 아직 뿌리 내리지 못하고 있는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우선 하나는, 우리나라에는 동양의 합리주의라고 할 수 있는 성리학으로부터 유래한 철학적 전통이 있어 경험론과 실용주의에 기반을 둔 사회민주주의가 지식인 사회에 뿌리내리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실학자들의 사상혁명은 자본주의 이전, 민주주의 이전이라는 시대적 한계 속에서 미완에 그쳤던 것이다.

사회민주주의가 쉽게 뿌리내릴 수 없는 또 다른 이유로서, 우리나라 진보진영의 철학적, 이데올로기적 혼란이라는 조건이 있다. 우리나라 자본주의는 너무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사회변화 역시 너무나 빨랐다. 이런 압축 성장으로 인하여 20세기에 선진국 국민들 세 세대가 경험했던 사회변화를 우리는 한 세대가 경험하고 있다. 그래서 지금 우리나라 진보에는 세 세대 좌파 이데올로기가 혼재되어 있다.

먼저 1920년대의 코민테른 시절의 좌파, 즉 맑스-레닌주의가 있고, 다음으로 1950년대의 사회주의인터내셔널(SI)의 좌파, 즉 사회민주주의가 있고, 다음으로 1980년대 녹색당 시절의 신좌파가 있다. 지금 우리나라 진보진영에는, 심지어 한 사람의 마음속에서도 이 3대가 대가족(大家族)을 이루고 혼거하고 있다.

정서적 미련으로 남아 있는 맑스-레닌주의만이 문제는 아니다. 혼란은 오히려 신좌파로부터 오기도 한다. 신좌파의 각종 이데올로기들을 이종태는 ‘지식인에 의한, 지식인을 위한’ 사유방식이라고 비판하였다. 바로 그런 점에서 신좌파는 구좌파와 같다고도 했다.

대중의 생활을 사유의 중심에 놓는다는, 즉 ‘철학이 대중에 복무한다’는 정신이라는 의미에서 민주주의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좌파는 노동운동의 이데올로기가 될 수 없다.

대중을 경멸하는 신좌파

신좌파는 흔히 ‘자본주의 외부’를 꿈꾼다. 그들은 자본주의 체제가 강요한 가치관을 내면화하고, 자본주의 체제에 순응하고 길들여진 대중을 경멸한다. 그러나 당대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대중의 경험을 경멸하거나 대중의 욕망을 “‘거짓 욕망’으로 몰아붙이고 머릿속에서 창출해낸 ‘진정한 욕망’과 ‘바람직한 대중’의 이미지는 문자 그대로 ‘공상’일 뿐이다.”(이종태, '1980년대 이후 한국의 진보운동 담론 비판', 주대환 외, 『한국사회와 좌파의 재정립』, 107쪽)

바로 이런 ‘지식인에 의한, 지식인을 위한’ 각종 이론과 사상들로부터 노동운동이 해방되기 위해서는 그저 일체의 ‘이념’을 거부하면 되는가? 아니다. 더 풍부하고 든든한 이념으로 무장해야 한다. 즉 사회민주주의라는 세계 노동운동이 수백 년의 시행착오와 경험의 축적으로, 지성(知性)의 성숙으로 마련한 이데올로기로 무장해야 한다. 백신 예방주사를 맞아야 항체와 면역력을 가지는 것과 마찬가지다.

흔히 사람들은 “나는 특정한 이념으로 노동운동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실제 생활과 실천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이념’에 질려버린 사람들이 많다는 이야기다. 그러면서 사회민주주의도 이념의 하나로 간주하여 거부한다. 그런데 바로 ‘특정한 이념이 없는’ 그 사람이 곧 사회민주주의자다. 홍길동이 ‘나는 홍길동이 아니다’고 주장하는 꼴이다.

흔히 말하는 ‘이념’이 일원론적인 사회발전 논리, 종말론적 역사철학을 가진 신념체계를 가리킨다면, 사회민주주의는 이념이 아니다. 그래서 사회민주주의는 ‘이념이 아닌’ 이념이며 ‘이념 이후의’ 이념이다. 그러나 바로 그래서 생명력을 가지고 있으며, 실제 생활에 도움이 되며, 그렇게 도그마에 얽매이지 않은 덕에 많은 성과를 내었다. 사회민주주의는 논리나 웅변이 아닌 결과로서 대중의 신뢰를 얻고 있다.

사회민주주의는 엘리트의 이념이 아니라 대중의 이념인 만큼 철저히 민주주의, 상향식 의사결정 과정에 기초하고 있다. 그 점이 매우 중요하다. 공산주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이름 아래 일당독재, 나아가 일인독재를 하였다.

민주주의 그릇에 담긴 사회주의

사회민주주의는 독재를 거부하고 개인의 인권 보장, 사상의 자유, 다당제, 삼권분립, 독립 언론의 존재 등을 지지하였다. 2,500년 전부터 내려오는 철인정치와 민주주의의 길 중에서 민주주의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민주주의라는 커다란 그릇에 사회주의를 담았기 때문에, 다른 식으로 말하면 민주주의라는 정치철학을 기본으로 사회주의라는 경제철학을 결합하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고 유연하며 탄력적이다. 그리고 새로운 요소들, 예를 들면 생태주의도,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다.

반면에 어떤 고귀한 가치 추구도 민주주의를 통하지 않으면 사회민주주의로부터는 이탈이라고 보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민주주의라는 정치철학이 더 근본적으로 중요하다는 말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민주노조운동에서 민주주의가 부족하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정갑득 금속노조 위원장은 “과거처럼 상층 단위에서 내리는 운동은 통하지 않는다는 게 증명됐다.”라고 말했다. 그의 말을 기자는 상명하달식 노동운동의 한계를 지적했다고 해석했다. (<한겨레>, 2009년 9월 29일자) 산별노조도 독일식 산별노조 모델을 위로부터 이식하려 했다고 보면서 이런 방식으로는 성공하기 어렵다고 본다.

서울 창동고등학교 교사 이기정이 『학교개조론』이라는 책에서 “7차 교육과정 반대 투쟁, 중등교사 자격증 소지자의 초등학교 교사 임용 반대 투쟁, NEIS 반대 투쟁, 교원평가제 반대 투쟁 등 합법화 이후 대부분의 투쟁에서 나는 돈키호테를 떠올렸다.”고 썼다고 한다.(<한겨레> 2009년 3월 30일자, 강준만, <전교조를 위하여>)

학부모이기도 한 국민을 섬기고 그 뜻을 받들고 대화를 나누려는 민주주의 정신이 전교조에 결핍되어 있었으며, 대신에 ‘나만 옳다’는 독선이 흘러넘쳤다는 이야기다.

사민주의, 민주노조 운동 혁신에 도움

그렇다면 바로 이러한 민주노조운동의 반성과 혁신에도 사회민주주의는 도움이 될 수 있다. 지금까지 민주노조운동의 이데올로기를 이룬 NL과 PD의 한계가 바로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의 결핍에 있었기 때문에, 그것들을 대체할 수 있는 철학과 이데올로기, 즉 사회민주주의(SD)가 좋은 약이 될 수 있다.

더 근원적으로 사회민주주의는 민주주의 시대에 어울리는 인간관에 근거하고 있다. ‘앞서서 가는 사람’(임을 위한 행진곡), 열사, 운동가(혁명가), 요컨대 자기희생적인 사람을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설정하고 있는 NL, PD와 달리 사회민주주의는 현실적 인간관에 기초하고 있다. 사회민주주의는 군자와 소인을 나누지도 않고 사람들에게 군자가 되기를 요구하지도 않는다.

사회민주주의는 누군가, 예를 들면 혁명가나 전위 정당이 진리를 가지고 있고 이를 대중에게 가르쳐야 한다는 진리관을 부정한다. 절대적 진리를 인식하는 것은 종교가 할 일이지, 노동운동과 정치가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진리는 따로 존재하지 않으며 경험적으로 입증된 보다 많은 사람의 이익과 행복이 곧 선(善)이라는 ‘위대한’ 실용주의 철학에 근거한 이데올로기가 사회민주주의다.

"노동+자유당 노선이 현실적 전략이다"
[사민주의와 차세대 노동운동④] "새로운 진보는 사민주의 운동"

이 글은 사회민주주의연대, 좋은정책포럼, 혁신네트워크가 ‘노동운동, 활로는 있는가’라는 제목으로 오는 19일 오후 3시부터 6시까지 프레스센터 19층 기자회견장에서 주최하는 토론회에서 발표될 필자의 발제문이다.

이 글에서 필자는 노동운동의 현주소를 진단하고, 노동운동의 위기적 상황을 가져온 요인들을 살펴본다. 그리고 “사회민주주의가 차세대 노동운동의 깃발”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여러 가지 쟁점을 내포하고 있는 이 글이 노동운동의 전망을 찾는 다양한 노력이 진행되는 현 시기에 의미 있는 논쟁을 촉발시키기를 기대하며, 필자의 동의를 얻어 전문을 몇 차례 나눠 싣는다. <편집자 주>

4. 사회민주주의(SD)는 차세대 노동운동의 깃발이다

흔히 사회민주주의를 개량주의라고 한다. 이 개량주의라는 말은 노동운동에서 타협주의라는 뜻으로 쓰인다. 그동안 노동운동이 사업장의 담장을 넘지 못하다보니 할 수 있는 타협이라는 것이 작은 타협들이었다. 그래서 그 타협을 하는 과정에서 비공식 대화들이 있었다.

그런데 비공식 대화를 위해 밀실에서 만나는가, 양주를 마시는가, 이런 사소한 것들이 노동운동에서 매우 큰 문제처럼 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걸 하면 개량주의자, 즉 타협주의자고 안 하면 혁명주의, 비타협적이고 전투적인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투쟁의 마무리와 타협을 투명하게 한다”는 자부심을 가진 노동운동가들이 자기보다 덜 투명하다고 생각되는 노동운동가들을 가리켜 사회민주주의자, 개량주의자라고 부르고 더 심하게 욕을 할 때는 어용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코민테른 결성 시기에 공산주의자들이 사회민주주의자들에게 가졌던 맹렬한 적대감은 20세기 말, 21세기 초 한국의 노동운동에 와서 ‘사회민주주의자’라는 말 속에 담겨 ‘배신자, 나쁜 놈’이라는 의미로 쓰였던 것이다.

사민주의자라는 욕설 또는 타협주의자

그래서 많은 사회민주주의자들이 “나는 사회민주주의자가 아니다”라고 말해왔다. 그 실제적 의미는 “나는 타협주의자가 아니다” 정도였다. 그리고 사회민주주의는 지금까지 노동운동에 발을 붙이지 못했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사회민주주의는 지금까지 노동운동의 실패에 대하여 책임이 없는 처지가 되었다.

사회민주주의는 한국 노동운동이 지금과 같은 상황을 위해서, 새로운 출발을 위해서 때를 묻히지 않고 숨겨두었던 깃발인 셈이다. 그래서 바로 사회민주주의(SD)는 차세대 노동운동의 깃발이다.

한편으로 지식인이라 자처하는 사람들 중에서는 흔히 사회민주주의를 이미 낡은 것이라 한다. “그 무슨 케케묵은 소리냐?”라고 말한다. 그런 사람들에게 기독교는 2,000년이나 되고 불교는 2,500년이나 된 낡은 것이라고 말해줄 필요가 있다.

민주주의도 2,500년이나 된 것이고 사회주의는 200년이나 되었으며, 시장(市場)을 인정하는 현대 사회민주주의는 1, 2차 대전과 스탈린 독재 등을 경험한 후 1951년에 <프랑크푸르트 선언>으로 확립되었으니 이제 겨우 60년도 되지 않았다.

그런데 지식인들은 유럽 선진국의 일류 좌파 지식인들(바로 유학생 시절 그들의 스승이다!)의 흉내를 내고 싶어 한다. 그들은 선진국의 비판적 지식인들이 자기 나라 사회민주당, 노동당, 사회당을 비판하는 소리들을 흉내 낸다.

유럽 선진국의 비판적 지식인들은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이 100년 전부터 내걸었던 강령을 거의 실현하고, 이제 자기들이 이룬 것을 지키는데 급급하여 ‘보수정당’이 되어버린 듯한 당연한(?) 현상을 비판한다.

유렵과 한국의 사민주의

유럽 선진국에서는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에게 불만을 느끼는 사람들이 신좌파, 극좌파 정당들도 만들고 있다. 당연한 현상이다. 예를 들면 노르웨이의 사회주의좌파당 같은 정당들은 이미 복지국가가 실현된 나라에서 등장하고 있다.

집권당, 또는 제1야당으로서 오늘의 국정을 책임져야 할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이 현실주의로 빠져 들어가는 것을 견제하고 비판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좌파, 극좌파 정당들이 크게 보아 사회민주주의운동의 범주를 벗어난 것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문제는 이제 겨우 후진국을 벗어나고 있는 우리나라의 지식인들이 세계사의 최첨단을 가는 유럽 선진국의 지식인 흉내를 낸다는 데 있다. 물론 세계 학계의 최신의 논의를 따라 가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현실과 선진국 현실을 혼동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에 대한 비판적 언사들을 흉내 낼 때 우리나라에는 비판할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그들이 선진국의 신좌파, 극좌파 정당들에 관심을 가질 때 우리나라 근로대중은 그들에게서 지적 허영과 사치를 느낀다.

사회민주주의 노동운동은 무엇을 주된 투쟁 목표로 하는가? 그것은 사회임금이다. ‘기업임금 올리기’ 노동운동은 한계에 왔다. 보편적 복지국가를 전략적 목표로 하여 너무나 낮은 우리나라의 사회임금을 높이기 위한 노동운동이 곧 사회민주주의 노동운동이다. 사회임금은 미조직 노동자들에게도 이익이 된다. 나아가 자영업자들에게도 이익이 된다. 그래서 진정으로 ‘국민과 함께 가는 노동운동’이 될 것이다.

양대 노총 통합을 지지한다

사회민주주의 노동운동이 지금까지의 민주노조운동을 비판적으로 계승하여 차세대 노동운동을 시작한다면 1세대 한국노총, 2세대 민주노총에 이어 제3노총이라도 만들 것인가? 아니다. 사회민주주의 노동운동은 노동운동의 분열을 지지하지 않는다.

물론 사회민주주의 차세대 노동운동은 한국노총은 ‘어용’이고 민주노총은 ‘민주’라는 도식을 거부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사회민주주의 노동운동은 오히려 적극적으로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의 통합을 지지한다. 그것이 노동자 대중이 바라는 바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복수노조 허용, 노조전임자 임금 문제 등의 거센 파고(波高)를 넘어 장기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사회민주주의 노동운동은 노동자 정치세력화에 대하여 어떤 전략을 가지고 있는가? 사회민주주의는 독자정당 노선, ‘노동당 노선’을 고집하지 않는다. 한국의 선거제도와 문화, 역사적 조건에 적응하기 위해서라면 노동자계급의 독자정당이 아니라도 상관하지 않는다. 이름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다만 노동자계급의 이익을 대변할 정당이 있어야 한다는 요구를 분명히 한다.

지난 십여 년 동안 경험한 민주노동당의 절반의 성공에 뒤이은 좌절로 드러난 우리나라 노동운동의 한계를 냉정하게 바라보고 앞으로 나갈 길을 모색해야 한다. 그래서 사회민주주의 노동운동은 한국의 현재 선거제도, 정치문화 속에서 ‘노동+자유’당 노선을 현실적인 전략으로 인정한다. 사회민주주의자는 공상으로 낭비할 시간이 없으므로, 이른바 진보적 정치학자들의 ‘희망과 주장’에 근거하여 정치세력화의 전략을 세우지 않는다.

지금까지 전세계 노동운동의 역사에서 사회민주주의자는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주도하고자 하지 않았으며 역사적 배경이나 문화적 풍토가 맞지 않는 곳에서 굳이 ‘사회민주당’을 창당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100년 전 영국에서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대중정당으로서 ‘노동당’을 창당하였다.

미래의 주인, 우리의 희망

마찬가지로 한국에서 ‘노동’당이 대중정당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없다면 ‘노동+자유’당이라도 만들고자 한다. 이런 전략을 사회민주주의자는 “이념은 순수하게, 정치는 현실적으로!”라는 슬로건으로 표현한다.

1987년 이후에 성인(成人)이 된 세대, 20대와 30대는 1987년 이전에 성인이 사람들과 매우 다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그 이전 세대가 공유하고 있는 어떤 강박관념과 고정관념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개인주의자’로 보이기도 하고 ‘실리주의자’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이야말로 미래의 주인이고 우리의 희망이다. 그들에게는 무엇보다도 민주화운동 세대가 떨치지 못하는 피해의식과 환상, 강박과 금기가 없다. 그래서 차세대는 정직하다.

사회민주주의는 바로 1987년 이후에 성인이 된 세대, 민주화 이후 세대, 이른바 2030세대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이데올로기이며 철학이다. 그러므로 1987년에 시작된 민주노조운동이 차세대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NL이나 PD와 같은 민주화운동 시기의 이데올로기, 후진국형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사회민주주의라는 선진국형 이데올로기로 재무장할 필요가 있다. 1987년에 노동운동을 시작한 노동운동가들은 지치고 힘들지만 다음 세대를 위하여 스스로가 가로막고 있던 문을 열 의무가 있다.

사회민주주의는 역사가 오래되고 여러 나라, 여러 시대에서 다양한 경험을 축적하였기 때문에 각자가 자기 나름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해석의 넓은 폭과 풍부한 내용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다양한 세력을 묶을 수 있는 깃발이다. 종교와 신앙을 달리하는 사람이나 지적(知的)인 배경이 다른 사람도 사회민주주의의 깃발 아래 함께 할 수 있다.

'제대로 된 정파' 하나

또 사회민주주의는 다수 국민들에게 선진문물(先進文物)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래서 사회민주주의는 대중 정치의 이념으로서도 커다란 장점을 가지고 있다. 노동운동이 사회민주주의 깃발을 내걸면 많은 국민대중은 신뢰감을 가지고 노동운동의 주장을 진지하게 들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회민주주의가 노동운동에 뿌리내릴 때 노동운동은 국민적 영향력을 회복할 것이다.

급격하게 진행되는 사회양극화로 선진국의 문턱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 한국에서 시대와 국민이 요구하는 ‘새로운 진보’는 곧 사회민주주의운동이다. 그러므로 노동운동이 ‘역동적 복지국가’를 실현하고자 하는 사회민주주의운동을 해야 진보운동을 이끌어갈 수 있다. 사회민주주의 철학으로 재무장한 노동운동은 진보적 사회운동 전체를 이끌어가는 원래의 위치, 시민운동에게 빼앗긴 자기 자리로 돌아갈 것이다.

임성규 민주노총 위원장은 작년에 ‘사회연대전략’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사회연대전략을 실제로 진지하게, 그리고 일관되게 추진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먼저 사회민주주의 깃발을 앞세우고 NL과 PD를 몰아내는 사상 혁명을 해야 한다.

그러므로 사회연대전략을 실제로 실천하려 하고, 민주노총의 혁신을 진정으로 바라는 노동운동가들은 사회민주주의의 깃발을 중심으로 ‘차세대 노동운동’의 새로운 흐름을 형성해야 한다. 그것은 강신준 교수가 요청한 ‘제대로 된’ 정파의 하나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끝>

주대환 / 사회민주주의연대 공동대표의 다른기사 보기